식빵같은 노래 광합성



그래도 한 때 좋아했던 오빠라고 뒤늦게 알게 된 솔로 앨범 발매 소식이 반갑다. 전체 구성을 보니 팬들 위한 앨범 같기도 하지만. 아무튼 벌써 이 노래만 벌써 한 시간 째 반복해서 듣고 있다. 전주 없이 바로 묵직한 오빠 목소리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마치 Forever Love 도입부 준짱의 '마앗~스구'급 펀치였다 끄흑.(장혜진의 1994년 어느 늦은 밤 생각도 나고.) 덕질 과거사로 자꾸 샐 것 같은데 이 포스팅을 하게 된 건 단순한 오빠 추억팔이를 위해서가 아니니 그만 얘기해야지.

사실 당신의 지갑에는 얼마의 사랑이 있냐고 묻는 제목을 보고는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를 떠올렸었다. 지갑이 가벼울지언정 가난할지언정 뜨거운 사랑을 모를소냐, 이런건가. 그런 생각으로 뮤직비디오를 재생했는데, 시작하자마자 오빠 목소리에 심장이 쿵 떨어졌고, 곧 '우리 엄마 아빤 더 작아질텐데'라는 노랫말에 아빠 생각이 나 눈물이 울컥했다. 이제 겨우 세 달 쯤 되었을 뿐인데, 기운 없는 아빠의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 방사선 치료 견디고 식욕 잘 회복했었는데, 갑자기 죽 한 그릇도 비워내기 힘들어하는 아빠를 보면 너무 속상하고. 그런데 우리 가족은 그 누구도 속상하다고 입 밖에 내지 않고 오히려 더 발랄하게 다음 메뉴를 궁리해내고 있다. 살아온 날들 중 가장 똥꼬발랄한 면모를 보이는 세 모녀가 아닌가 싶다. 당연히 뼛속까지 긍정적이고 싶지만, 도대체 이런 상황에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하는지 여전히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누구보다 가장 힘든건 우리 아빠니까, 나는 절대 힘들어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꾹꾹 누르는 요즘.

그런 중에 어차피 세상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으니,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얘기하는 오빠의 노래는 내 어깨를 톡톡 토닥여준 것 같았다. 고단해도 함께 할 수 있음에 힘내라고, 온 세상이 행복하면 좋겠다고. 그래서 나는 노래를 들으며 식빵이 생각났다. 따뜻하게 구워내 삭삭 바른 버터가 사르르 녹아든 식빵같은 노래. 그런 식빵은 우리 가족의 일요일 단골 점심 메뉴였다. 이렇게 먹으면 끼니를 제대로 챙긴 것 같지 않다고 툴툴댄적도 많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동생과 나의 일요일 점심은 그런 식빵이었다.


2015년 가을, 그럼에도 긍정 01. 여기, 나

많은 일이 있었다고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지만 그로는 역부족인 가을이었다.

취업난에 힘들어하는 글을 쓰고 난지 어언 2년만에 돌아와선 퇴사와 새 꿈을 이야기하고, 오랜 숙원이었던 여름 휴가를 되돌아봤었다. 비로소 개인적인 이야기를 오래 풀어놓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찾아 키보드를 잡았던 것인데, 지난 두 달간 나의 생활은 다시 180도 바뀌게 되었다.

아빠. 나의 아버지. 아빠가 많이 아프다.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시다. 8월의 무더운 오사카에서 가족 전지훈련을 이끌어나갔던 튼튼하고 건강해서 무서웠던 아빠는 11월이 되니 갑자기 우리 가족 중 가장 많이 챙겨야 할 사람이 되었다. 건강검진에서도 안보였던 비열한 암 세포 자식은 건강한 아빠를 양분으로 삼아, 숨죽이며 금세 여기저기서 자라왔다고 했다. 수술이 어려울 정도지만 그래도, 정말 다행인 것은 표적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였다. 그 누구보다 건강했던 아빠는 방사선 치료와 약 복용을 시작하며, 건강의 상징이었던 등산과 조깅, 그리고 음주의 일상을 잠시 중단했고, 단 한 번도 끼니를 거른 적 없고, 음식을 가리지도 않았던 모험가답던 아빠는 갑자기 가장 입이 짧고, 속이 예민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도, 엄마도, 동생도, 나도 모두 열심히 긍정적으로 지나온 지난 한 달 반. 지금도 매일 말도 안되는 악몽을 꾸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만, 나쁜 놈을 이 악물고 몰아내기 위해 아빠는, 그리고 우리 가족은 아주 열심히 싸우고 있다. 사실 어제도 나는 자기 전에 남자친구와 통화하며 울어버렸지만, 담금질을 통해 단단해지듯 조금이나마 마음이 단단해진 지금에서야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던 순간을 드디어 기록하기로 마음먹게 됐다. 아빠의 투병과, 가족의 투항도 현재진행중이며, 우리의 미래도 쭉 진행중인 지금부터 나는 아주 강인하고, 멋진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적어두려고 한다. 어디에나 있지만 결코 아무에게나 찾아오지 않는 삶의 위기. 살면서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사랑했던 날들이었다고 추억되는, 우리 가족사 중 가장 훌륭한 챕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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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존 퇴사일은 11월 6일 금요일이었다. 9월 중순 즈음에 퇴사를 고한 것 치고는 꽤나 늦은 퇴사일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바쁜 일을 잠깐 마무리지을 수 있는 날이었다. 그런데 정말이지, 퇴사하는 날까지도 너무 바빴다. 매일 야근을 했지만 인수인계를 제대로 할 시간도 없었다. 구멍가게같은 회사라 내 담당이었던 채용 업무에 큰 빵꾸가 나면 끔찍할 일이었다. 회사의 사정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고마운 팀원에게 시한폭탄을 던지고 가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일주일만 더 인수인계를 위해 나와주기로 했다. 정말 딱 일주일. 이미 마음이 떠난 지 한참이라 일을 길게 해봤자 나나, 회사에나 좋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퇴사가 미뤄졌다고 엄마에게 얘기했던 기존 퇴사일 다음 날, 엄마는 나와 동생을 불러놓고 아빠가 암이라고 얘기했다. 듣고싶지 않았던 폐암 4기. 엄마는 이미 오랫동안 마음을 다졌는지 담담하게 얘기했고, 아이에게 얘기하듯 쉽게 풀어서 아빠의 상태를 설명해줬다. 그러니까 둘이서도 싸우지 말고, 아빠한테도 틱틱거리지 말라고 부탁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이야기였지만 울지 않았다. 이미 수없는 밤 혼자 이불 속에서 소리없이 한참을 울었으니까. 엄마에게는 얘기했다. 검사 결과를 물어봐도, 대답을 자꾸 피해서 암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고. 4기면 그래도 정말 완전 말기는 아니니까 잘 될거라고. 그동안 죽죽 뽑아낸 눈물 덕분인지, 꾹꾹 참아 강한 큰 딸 흉내를 내고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한 살 어린 여동생도 예상하고 있었다고 말꼬리를 흘릴 뿐 울지 않았다. 몇 분 후 다시 엄마를 찾으니, 엄마 품에서 동생이 소리없이 울고 있었고 동생이 우는걸 보니 나도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그래도 울지 말고, 강하게 마음먹자고, 잘 될거라고 서로 다독였다.

정말 그 결과를 예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상처받기를 너무나도 싫어하는 사람이라 아빠가 검사를 받고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부터 최악의 생각을 떠올렸다. 그동안 내가 위기의 순간마다 해왔던 것처럼 그냥 최악의 가정일 뿐이기를 바랐다. 휴가를 돌아보는 짧은 포스팅에도 썼었지만, 나는 퇴사 후 뉴욕 여행을 꿈꿨다. 극성수기가 되기 전, 11월 중순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마친 뉴욕에 열흘 정도 머무를 계획이었다. 엄마는 갑자기 엄마의 노후, 내 대학원 등록금과 생활비 얘기를 꺼냈다. 만년 백수 니트족인 동생에게는 취업하라는 소리도 안하면서 내게만 돈 얘기를 꺼내는 게 너무 억울하고 속상했다. 한 살 차인데 왜 나한테만 그렇게 큰 딸의 책임감을 씌우냐며 엄마를 원망했다. 물론 아무렴 회사 때려치우고 대학원을 가는 내 마음도 편치는 않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당분간은 가지 못할 것 같다고 엄마에게 토로했다. 고된 일 년 반의 취준 시간을 거쳐 취업하고, 일 년 동안 딱 6일의 휴가만 허락되었던 나 자신에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선물을 해주고 싶다고. 마침내 90만원대 뉴욕 직항 항공권 결제를 코앞에 두고, 나는 괜한 미안함에 "집에 누구 아픈 사람 없지?" 농담으로 물어봤다. 티비를 보던 아빠는 고개를 저었고, 엄마도 아픈 사람 없다고, 그런데 이왕 갈거면 동생과 함께 다녀오는 게 좋지 않겠냐고, 잠깐만 홀딩하는 것을 제안했다. 이렇게 미룰수록 표 가격이 더 높아진다고 울상을 지으니, 그 티켓값은 엄마가 책임지겠다고 확인을 받고 나서, 나는 항공권을 취소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빠가 출장을 갔다고 했고, 엄마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동생과 나는 한 목소리로 아빠 집에 없으니 친구랑 놀다 늦게 돌아오는구만, 놀렸는데, 엄마는 사실 아빠가 출장을 간 게 아니라고 했다. 그럼 여행을 갔냐는 질문에 엄마는 아니라고 했고, 눈치가 꽤나 빠른 나는 아빠가 병원에 갔구나, 라고 대답해버렸다. 엄마에게 아픈 사람 있냐고 물어볼 때 왜 대답 안했냐고, 집에 아픈 사람 있는데 뭘 놀러가냐고, 철없는 딸내미로 만든 엄마에게 뉴욕 여행할 생각이 추호도 없음을 알렸다. 자세한 건 검사를 해봐야 아는 때였지만, 나는 아마 이 날 부터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었던 것 같다. 남자친구를 붙잡고 아빠가 혹시나 아주 못된 병에 걸린 게 아닐지 두려움에 울었지만, 정말이지 쓸데없던 눈물이기만을 바라는 심정이었다.

회사에서 일을 하며 집에 있는 동생에게 집 분위기와, 엄마에게서 소식이 없는지 매일 여러 차례 물었다. 검사 결과를 묻기도 두려웠지만, 결과를 알려주지 않는 것이 더 두려웠다. 종종 독촉하면, 엄마는 아직 모른다고, 이것 저것 검사할 게 많다면서 별일 아닌 양 어깨를 으쓱했다. 엄마는 미용실에 가서 머리도 했고, 얼굴에 마스크팩도 했고, 친척 결혼식도 갔고, 친구도 만났다. 나는 그런 일상적인 행동들조차 중요한 의식같이 느껴지는 두려움과 초조함 속에서 아빠에게 아무일 없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거진 매일 야근을 하다 원래의 퇴사일이 되어서야 퇴사를 일주일 미루게 됐고, 토요일에 아빠 소식을 듣고, 일요일에 아무 일도 없는 듯 가족들과 중부시장으로 나들이를 다녀왔고, 돌아온 월요일, 나가지 않아도 됐을 회사로 나갔다.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엄청난 고민을 하게 됐다. 나라도 회사를 다녀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가족에 큰 위기가 생겼는데, 우리 가족의 문제도 해결 못하는 데 무슨 사회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이 판국에 대학원인가 싶었다. 모든 부모는, 그리고 특히 나의 부모님은 내가 하고싶은 것을 하게끔 해주는 분들이었고, 나 하나 당장 돈 못번다고 해서 경제적인 문제도 없었기 때문에 얼른 하고픈 공부를 마치고, 즐겁고 보람차게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자 결심했었는데, 그 결심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죄책감과 절망감, 혼란에 빠져있는 와중에 팀장은 내게 퇴사 후 계획을 물었고, 나는 시끌시끌한 직원식당에서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시다고 대답했다. 치료를 시작하실거라고, 잘 이겨낼거라고 담담하게 얘기하려고 했는데, 엄마 앞에서 간신히 참아낸 눈물 댐 수위가 위험하게 흔들렸다. 선배들은 내 대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망할 팀장은 내게 누구나 다 겪는 일이라며 오히려 이렇게 된 이상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누구나 다 겪는 일이라니. 모든 인간에게 목숨이 하나며, 보통 자식이 부모님을 좋은 곳으로 배웅해 드리는 것은 나도 알지만, 그건 그 당시의 나도, 지금의 나도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별을 먼저 얘기하며, 마음 강하게 먹으라는 최악의 격려에 화를 낼 법도 했지만, 나는 정말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엄마 나 회사 더 다닐까? 회사 사람들 나 나간다고 하니까 엄청 아쉬워하네. 내가 일을 솔직히 겁나 잘하긴 했거든 호호."

이미 수 백 번 회사 다니기 싫다고,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바른 생활 소녀였던 나의 양심과 의지가 아깝다고 얘기해왔는데, 아무렴 내가 연기를 잘했어도 '그건 그래. 우리 딸 조금만 더 다녀봐.'라는 대답을 들을 리 만무했다. 진짜 석사 학위 가진 자식 가져보자며, 그깟 회사에서 썩기 아깝다고 인상을 찌푸렸다. 잘 알고 있다. 사정이 이렇게 됐으니, 회사에 더 다니라고 할 리 없었다. 결국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었다. 내가 회사에 더 다니겠다고만 하면 바로 퇴사가 철회되는 것이었다. 다시 퇴사까지 딱 5일이 남은 월요일이었다. 그 사이에 마음을 정하고, 선택을 해야했다.


간사이, 가족 전지훈련 01. 이방인

갑자기 나의 여름 휴가 일정을 물어보시던 아빠. 아빠 우리 회사엔 권장 휴가 기간 따위 없어. 이때 제발 다녀오게 해주세염, 하면 오케이 받는거야. 나의 연차는 작년에 일한 딱 6개월 분이 나온 6일. 이미 홍콩행 티켓을 산 뒤였기 때문에, 아끼고 아낀 연차 이틀을 쓸 수 있었고, 아빠는 급 네 가족 간사이 여행을 추진하셨다.

도쿄는 내가 이미 다녀왔기도 했고, 특별히 볼 거리가 많지 않을거라는 이유로 아웃. 나는 무더우니 훗카이도에 갑시다! 추천했으나 엄마가 친구로부터 주워 들은 이야기-훗카이도는 노인네 되서 가도 충분해!-로 그나마 구원처였던 훗카이도 아웃. 그럼 먹을 거 많고, 볼거리 많은 오사카-간사이 지방으로 갑시다! 해서 오사카를 가게 된 것임. 엄마, 아빠, 동생, 나 이렇게 네 명이서 해외 여행을 가다니. 7살 이후 처음이라 두근두근하면서도, 걱정이 태산이었다. 아니나다를까, 계획을 짠 나와 아빠 외에는 무지했고, 로밍은 나만 해갔고(젝일!!!) 유일하게 일본어를 읽을 줄 아는 내게(구사하지 못함. 도꼬데쓰까? 이꾸라데쓰까? 이끼마쓰까?!!!!!) 의지하는 우리 가족을 보며 효도 관광은 참 어렵구나,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다시 한번 외칩니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고마워요!!!

효도관광에도 불구하고 전지훈련인 것은, 평소 여의도 두 바퀴를 빠른 걸음으로 운동하시는 아버지의 여행 철학 "볼 수 있는 건 다보자"과 무한 자유 배낭 여행이 결합한 덕분인 것이니. 앞으로 종종 써나갈 간사이 여행기는 간사이 전지훈련으로 갈음합니다. 아래 사진은 무작위로 고른 교토의 몇 개 사진. 보기만해도 더웁네. 헤헤.




길고 긴 철학의 길을 겨우 걸어나와 만난 자판기 녹차찡. 더워... 덥다고...

기요미즈데라, 청수사. 그냥... 더워... 더워 쥭겠어 하...


교토의 저녁 풍경은 참 좋았고, 엄마가 옆에 있는데도 엄마가 보고팠다.



사과 방송으로 시작해야 할 것만 같은 포스팅의 급 마무리인데, 모르겠다. 졸리다. 갑작스럽게 답지않은 무리한 연속 포스팅이었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진득하니 기억을 더듬어 여행기를 남기고 싶다. 아빠 사진까지 모아서 책으로 만들어 드려야지 헤헤.

9월, 홍콩이었다 이방인


9월 초, 무더위의 끝에 홍콩에 다녀왔다. 오랫동안 손꼽아 기다려온 홍콩이었는데, 8월에 급 가족끼리 오사카로 여행을 다녀오는 바람에 두근거림이 쪼오끔 가신 채로 다녀왔달까. 계속된 더위에 지쳐서 홍콩은 전혀 로맨틱하지 못했다. 루프탑 바에서 칵테일이라도 마셨어야 했는데. 친구랑 배낭여행 하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우리 제주도가 더 로맨틱했어! 이것은 다 더위, 그리고 네가 좋아하지 못하는 홍콩 음식 때문이야! 다음엔 춥고 맛있는 곳으로 가야겠다. 가서 부비적 부비적 로맨스의 끝을 봐야지.

그래도 좋았다. 힘들 때 침착하게 잡아주던 그 손이, 짜증 가득한 얼굴에 어설픈 부채질을 해주던 미소가 좋았다 헤헤. 짜증을~ 내어서~ 무얼~ 하나~~ 난 그런 네가 참 좋더라.

열흘 간격의 글 여기, 나

원서를 제출했다. 하고싶은 말이 너무 많은 데 뜯어보면 알맹이는 결국 하나라, 무슨 말을 내가 지껄인걸까 싶지만 냈다 드디어. 텝스는 괜히 봤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무엇을 위한 S대 타령인가 하하. 아무튼 보니까 글을 열흘에 하나 꼴로 쓰고 있더라.

내 자리 채용 공고도 드디어 게시됐고, 이번 주 중으로 퇴직원을 제출하라는 지침도 받았다. 정말 어찌 보면 나갈 날도 얼마 안남은 후련하다면 후련해야 할 날들이지만 언제나 걱정투성이이다. 아빠에게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도대체 언제가 되어야 걱정하지 않고 사는거야?" 아빠는 나에게 무어라 답해줄까.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고 할까. 아빠는 지금 퇴근해서 양치중. 30년동안 일해온 우리 아빠는 도대체 어떻게 그 긴 시간을 살아올 수 있었을까. 감사하고 미안하고, 또 고마울 뿐이다. 아빠 그리고 엄마! 사랑해요!

그나저나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이지만, 퇴사하고 11월 중에 뉴욕이나 암스테르담에 가고 싶다. 사실 예전부터 나와 대자연만 남는 곳에 가고 싶었는데, 아이러니하게 혼자 가긴 아무래도 쓸쓸해서 그런 곳엔 든든한 내 밧줄 걸고 같이 가려고 한다. 차라리 그렇게 오래 부르짖던 부르다 죽을 빠리에 다시 갈까, 싶기도 했는데 내 다시 홀로 돌아가진 않겠다 다짐하기도 했었고, 혼자 간다면 내가 아는 외롭던 겨울이 아닌 봄여름의 빠리에 가고 싶어서 패스. 퇴사가 조금이라도 일렀으면 주저없이 근사한 가을의 뉴욕을 느끼러 떠났을텐데, 낙엽 다 진 뉴욕은 쓸쓸하려나? 변덕스러운 날씨의 암스테르담에서 이방인임을 만끽하는게 좋으려나.

아마 열흘 후 마지막 야근을 불태우고 있을 내 모습 그 사이에 비행기 표를 끊을 결심을 한다. 다시 한번, 사랑해요 엄마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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